다 함께 한마음이 되어

 

 

 




다 함께 한마음이 되어

* 도기 130년 1월 30일 종정님 말씀

오늘 저녁 이렇게 서산에 와서 상제님 말씀을 전하게 되니, 다른 지역에서 느낄 수 없는 감회가 솟는다. 이곳은 우리 할아버지 고향이다. 아침에 태사부님과 식사를 하면서 내가 “아버지, 오늘 할아버지 고향땅을 가네요.” 하니까, “그렇다. 서산이 우리나라에서 땅이름 치고는 가장 좋은 곳 아니냐. 상서로울 서(瑞) 자 아니냐.”고 하신다.

오늘은 내가 특별히 전하고 싶은 것이 있다. 증산도 수행법에서 가장 핵심되는 몇 가지 말씀이다. 오늘 내 말씀 듣고 이곳 서산 지역 신도들이 더욱 크게 깨져서 충청도에 증산도를 뿌리내리는 핵심 일꾼이 되기를 바란다.

증산도에서 전하는 수행법은 과연 무엇인가?

먼저 이제까지 인간이 알고 행해 온 수행법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그 동안 수행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이나 이론적인 지식이 없어도, 각 종교권에서 행해 오고 있는 수행이 어떤 것인지 대개는 알고 있다. 불가에 고전적인 수행법으로 남방불교의 비파사나가 있다. 또 불교가 중국화되는 과정에서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나온 선불교, 우리가 흔히 말하는 참선이 있다. 북방불교에서는 이 참선을 주로 한다.

유가에는 정일집중(精一執中), 건중건극(建中建極)이라는 대의로 유가 고유의 심법 닦는 수행법이 있다. 도교에는 지금 대중화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 귀에 익은 선도(仙道) 수행법, 곧 소주천(小周天)이니 대주천(大周天)이니 해서 나름대로의 행공법(行功法)이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동방문화의 중심에 자리한 우리민족의 고유의 전래 수행법이 있다. 이것을 국 도(國仙道), 신교(神敎) 수행법, 삼신(三神) 수행법 등 몇 가지 호칭으로 부르는데, 그 나름대로 독특하다. 다른 종교 문화에서는 보기 힘든, 좀 낯 것 같기도 한 수행법이다. 하지만 궁극으로 들어가 보면 다른 것들과 다 통한다.

영원히 사는 길

수행이란 무엇인가? 왜 인간은 수행을 해야 하는가?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유년기와 10대 소년기를 지나 인생에 대해서 자신의 꿈과 의지를 갖고 광활한 세상 무대에 첫 발자국을 떼어놓기 시작하는 20대에는, 삶의 여러 가지 문제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한다. 몸도 컷고, 이제는 어려운 세파를 헤치면서 자신의 생명을 바르게 끌고 한 세상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과연 어떻게 사는 게 참된 삶인가? 무엇을 일러 진실한 삶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렇게 고민하면서 중년인 30대, 40대를 지나 50줄 장년을 훌쩍 뛰어넘어 6, 70 노년기에 접어든다. 한 생에 반딧불처럼 반짝하다 늙어버린다. 그러다가 해 놓은 것 하나 없이, 인생에 대해 크게 깨우친 것 없이 가 버리고 마는 것이다.

옛 사람들도 수행은 젊어서 해야 한다고 했다. 원효도 그런 충고를 남겼다. 낡고 망가진 수레가 굴러갈 수 없듯이 사람도 늙으면 수행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누우면 게으름만 생겨나고 앉아 있어도 어지러운 생각이 몸을 앞서가도 안 된다. 음양의 조화가 안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몸이 팔팔하고 정신이 맑을 때, 젊을 때 열심히 수행해서 생사의 사슬, 윤회의 사슬을 끊으라는 것이다. 영원이 이 세상에 다시 올 필요가 없는 생명의 근원으로, 본래 너의 근원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이것이 공부한 모든 이들이 일관되게 가르쳐 주는 깨달름의 결론이다.

자 원론으로 들어가자.

우리는 수행을 해야 한다. 도를 닦아야 한다.

그러면 수행을 한다거나 도를 닦는다는 게 무엇을 말하는가?

글자의 의미를 보면, 수행(修行)이니 수도(修道)라고 할 때, 닦을 수(修) 자를 쓴다. 닦는다는 것은 쉽게 얘기해서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청결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영어로는 컬티베이팅(cultivating), 또는 클렌징(cleansing)이라고 한다. 설거지를 하듯 더러워진 방을 닦듯 청소한다는 것이다.

또 수행(修行)의 행은 움직인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수행은 움직임을 닦는다. 움직임을 조정한다는 것이다. 무엇의 움직임을 닦는 것인가? 내 몸과 마음의 움직임을 닦는 것이다.

모든 생명의 본성은 변화성이다. 이 대우주의 본성도 움직임이다. 무브먼트(movement), 곧 역동성이다. 내 마음도 그렇다. 몸의 오장육부 혈액이 계속 순환하듯이 마음도 변화해 간다. 끊임없이 생멸운동을 한다. 한 생각이 일어났다가 멸하고 또 다른 생각이 일어난다. 그래서 과거와 현재, 미래를 번갯불처럼 오간다. 생각들이 때로는 어떤 질서를 갖기도 하고 변태적으로 얽히기도 하고, 순간적으로 멸했다가 곧바로 솟구친다.

따라서 내 몸과 마음의 움직임을 바르게, 밝은 곳으로 향하게 해야 한다. 탁하고 더러운 곳을 씻어 내고 밝고 순수한 내 생명의 본래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

내 생명이 본래 시작된 근원이 있다. 모든 인간과 만물, 더 나아가 우주가 태어난 궁극의 근원이 있다. 그것을 영으로 보면 광명 그 자체다. 거대한 근원(the great source)이다. 그 근원이 우리 생명 속에 그대로 깃들어 있다. 그 근원을 도라고 하는데, 수행을 통해 우리는 그것을 닦는다. 이것이 우리가 영원히 사는 길이다.

증산도 수행은 가을개벽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우리가 몸 담고 있는 곳은 증산 상제님의 도다.

증산도의 가르침은 기성의 불교, 유교, 기독교, 도교의 성자들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르다. 수행법도 그렇다.

물론 수행의 원론적인 의미는 같을 수 있다. 하지만 왜 수행을 해야 하느냐, 수행을 어떻게 하느냐, 즉 수행의 목적과 방법은 다른 점이 있다.

20세기의 인도문화 또는 일본이나 한국, 동남아에 있는 종교문화권에서 공부하고 영성에 눈뜬 이들이 영미나 구라파같은 서구문화권에 가서 전하고 있는 수행법이 있다. 티엠(TM) 명상법 같은 것이 그것이다.

19세기 말엽에 미국으로 건너간 인도의 요가난다 같은 사람이 있다. 그가 세운 명상센터에서 수행 전문가를 기르기도 하고, 인도 고유의 수행문화를 체계화해서 전하고 있다. 그 외에도 현대인들의 건강과 생명을 회복시키는 치유의 방편으로 수행을 지도하는 힐링(healing)단체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증산도 수행법은 선천문화에서 전하는 그런 수행방식과 근본적으로 확연히 구분되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이 우주의 개벽 때문이다.

우주의 현상 가운데 인간이 가장 알기 어려운 것이 있다. 지난날 예수와 석가, 노자와 공자가 그들의 깨달음의 최종 결론으로 전한 것이다. 앞으로 인류역사의 운명을 가름하는 어떤 대변혁이 온다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보통 종말 사상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종말이 아니다. 증산도에서는 그것을 과학적, 철학적, 종교적으로 전한다. 그것이 바로 개벽이다! 후천개벽이다!

인류문화 발전사로 볼 때, 서양의 우주인식과 깨달음의 핵심은 유일신의 창조론이고, 동양의 인간과 우주에 대한 깨달음의 핵심은 개벽론이다. 크게 창조문화와 개벽문화로 대조된다.

이 두 문화의 다른 점은 ‘시간의 문제’다. 서양에서는 시간에 시작이 있다고 한다. 유일신이 창조함으로써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동양의 개벽관으로 볼 때, 하늘 땅이 탄생하는 사건으로 개벽이 있다. 천개지벽(天開地闢)이다. 그것은 창조가 아니다. 우주 내에 자재(自在)하는 어떤 이법이 바탕이 되어 열린 것이다.

이 개벽관과 창조관이 동서문화의 세계관 우주관 인식의 근본 차이점이다.

그렇다고 동양의 개벽에 신이 전혀 개입되지 않는건 아니다. 알고 보면 동양에도 우주의 원신(元神)이 있다. 그러나 원신은 서양에서 말하는 조물주(the Creator)가 아니다. 원신은 이 우주에 충만해 있는 조화신(造化神)인 삼신(三神)이다. 우주는 이 우주의 원신(元神)이 이법(理法)과 하나 되어, 하늘과 땅으로 질서화되는 과정에서 열린 것이다. 즉, 인간과 생명을 낳는 구체적인 변화의 틀을 구조화시키는 과정에서 열린 것이다. 그리고 우주는 어떤 틀을 가지고 순환한다. 이것이 개벽시간의 구체적인 순환 모습이다.

동서양의 이 변화 과정에 대한 인식도 다르다.

서양에서는 창조의 시간대로부터 시간이 쭉 일직선으로 흘러간다고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종말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그같은 시간의 종말이란 없다. 한 시대의 종말은 다른 시대로 뛰어드는 순환의 지속이 있을 뿐이다. 순환한다고 인식한다. 천지에서 인간을 낳아 길러서 변화를 마치는 한 주기를 우주일년이라고 한다. 그게 증산도에서 말하는 우주일년론이다. 우주에 1년이 있다. 그리고 그 우주 1년의 근본 법칙이 생장염장(生長斂藏)이다.

상제님께서 말씀하신다.

* 나는 생장염장(生長斂藏)의 사의(四義)를 쓰나니 이것이 곧

무위이화(無爲以化)니라. 하늘이 이치(理致)를 벗어나면 있

을 수 없느니라. (道典 2:49:1~2)

생장염장!

지금까지 과학자들이 생명을 다 바쳐서 탐구해 온 궁극의 주제가 무엇이었는가?

‘이 우주는 어떻게 생겼는가? 우주는 어떻게 태어나 돌아가는가?’ 바로 시간의 문제다.

시간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과연 시간의 시작은 있는 것인가?

이데 대해, 노벨상 수상자인 일리야 프리고진(Ilya Prigogine, 1917~)은 [확실성의 종말]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시간의 시작은 있었느냐 없었느냐 하는 질문에서 나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 현대과학에서 말하는 빅뱅, 우주가 약 백억 년 전에 초고온 초고압에서 우주가 폭발했다. 티밥을 튀기듯 터져서 하늘 땅이 생성되어 열렸다. 그러나 그것도 천지가 태어나는 사건일 뿐이다. 시간은 그 전에도 있었다. 따라서 시간은 시작도 끝도 없다.

시간이란 시작도 끝도 없이 변화의 질서를 그려 나간다. 증산도에서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이 ‘시간’의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 질서의 사이클을 우주일년으로 전해 준 것이다.

우주에 1년이 있다. 우주에도 봄여름가을겨울, 4계절이 있다. 봄여름을 선천이라고 하고 가을겨울을 후천이라고 한다. 우주 1년은 지구년수로 12만9천6백 년이다. 이 시간의 구조를 처음으로 알아낸 사람은 중국 송나라 때의 소강절이다. 소강절이 백원사라는 절에 들어가 30년 동안 [주역]공부를 하고 우주에 개벽이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소개벽, 중개벽, 대개벽, 그리고 우주 1년이 완전히 끝나고 새 우주 1년이 다시 시작되는 일원(一元) 개벽이 있다. 그 년수가 12만9천600백 년이다. 순환의 근본주기는 360도인데 그것이 다시 360번 순환되어 이루어지는 것이다.”

상제님은 그 동안 우주에 대해 공부한자 가운데 소강절이 알아낸 우주 1년, 12만9천600 년이라는 시간 수, 변화의 도수는 상제님이 주재하는 우주개벽 틀의 비밀을 벗겨낸 것이다. 그래서 상제님은 “알음은 강절(康節)의 지식이 있나니 다 내 비결이니라. (道典 2:39:1)”고 하신다.

그 동안 여러 번 우주 1년이 있었다. 현대과학에서는 우주 1년이 2백 번까지 있지 않았겠느냐고 한다.

우주 1년의 봄시간대, 선천개벽 때에 현생인류가 생겨났다. 오늘날 지구촌에 살고 있는 현생인류는 오만년 전에 태어난 것이다. 인류학과 고고학에서도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

이번 우주 1년에 태어난 인간들은 봄여름 선천 오만년 세상을 살았다. 이제는 가을로 들어간다. 천지가 봄에 생명을 낳고, 여름철에 기르고, 셋째 단계인 가을철에 그것을 거둔다. 염은 거둘 염(斂) 자다. 이 거두는 과정이 인간 역사에서 전 인류의 생사를 가름질하는 대변혁의 과정으로 현실화된다. 때문에 옛 성자들이 깨달음의 결론에서 한결같이 그것을 마지막 심판, 또는 전혀 다른 인류 역사로 들어가는 결정적 분기점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 신구약 66권의 마지막 [계시록]은 예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사도 요한이 기록한 것이다. 그가 팻모스섬에 귀양 가 있을 때 기도하면서 본 게 있다. ‘예전의 하늘과 땅(the first heaven and first earth)'이 사라지고 ’새 하늘 새 땅(the new heaven and the new earth)' 이 열리더라는 것이다. 그것이 기독교의 최종 결론이다.

인간이 태초로부터 태어나 살아온 천지질서는 낡은 질서다. 그 낡은 천지질서가 닫히고 완전히 다른 새 질서가 열린다. 하늘 땅의 질서가 완전히 바뀐다. 그리고 새 하늘 새 땅이 열린다. 이것은 엄청난 얘기다. 백 번, 천 번, 만 번 들어도 신비스럽다.

이 새 하늘 새 땅은 무엇인가? 지금까지 살아 온 지구가 완전히 폭발해서 없어지고 다른 지구가 탄생한다는 말인가? 그래서 마치 배를 갈아타듯 살아남은 인간들이 어떤 통로를 만들어 옮겨 타게 되는 것인가?

아니다. 그게 아니다.

새 하늘 새 땅은 변화 질서가 바뀐 새 천지를 말한다.

여기에 바로 왜 수행을 해야 하는지, 그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우리는 지금 과학문명 덕택에 편안하게 살고 있다.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다. 어지간하면 물질적인 복락을 다 누리고 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살기 좋은 때다. 지구촌을 자기 앞마당처럼 드나들 수 있는 이 좋은 세상에, 왜 과거 석가나 예수 시대, 그리고 그 후 어떤 시대보다 더 수행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왜 증산도 수행법은 기존문화의 수행방법과 다른가?

바로 우주개벽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때가 바로 질서가 바뀌는 가을개벽의 시간대로 들어서고 있는 때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천지에서 생명을 거두는 추수기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이 변화에는 우주의 손길이 뻗쳐 있다. 그 동안 하늘이 인간과 만물을 기르고 다스려 온 변화의 방식, 변화의 이법이 뒤집어진다.

봄여름의 변화는 양도(陽道) 변화이면서 양적(量的) 변화다. 분열하여 숫자가 늘어나면서 자라왔다. 가을은 음도(陰道) 변화이면서 질적(質的) 변화다.

양적 변화에서 질적 변화로 대비약한다.’

이것은 대단히 철학적이면서 또한 우주자연 질서의 근원적인 문제다.

천지에서 양산해 놓은 모든 생명체를 생장에서 다음 셋째 단계인 염(斂)으로 들어가면서 거둔다. 거둔다! 이 거둔다는 것은 쉬운 말로 제거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다 죽인다. 가을우주에 생명의 성숙을 위해 죽음의 질서가 들어온다.

질과 양의 문제로 볼 때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도록 되어있다. 반드시 양이 질을 개선한다. 어떤 일정한 양이 되면 궁극에 가서는 시스템 자체가 질적으로 바뀐다. 그렇지 않으면 붕괴되고 만다.

지금 우주의 봄여름철 선천과정을 살면서 인간 숫자가 60억을 넘어섰다. 1년이면 불어나는 수가 2억 정도가 된다. 5년 후에 70억 정도가 되고, 21세기 중엽 정도 되면 백억이 될 것이다. 그것만 봐도 지금의 문명이 지속되지 못할 숱한 난제가 있다.

우주가 봄에는 끊임없이 생명을 낳고 여름철에 꾸준히 길러준다. 사실 이러한 봄여름에는 인류가 우주 변혁의 손길을 크게 못 느낀다. 하지만 가을로 들어설 땐 그렇지 않다.

다 함께 [도전] 7편에 있는 상제님 말씀을 보라.

* 선천개벽 이후로 홍수와 가움과 전쟁의 겁재(劫災)가 서로 번갈아서 그칠

새 없이 세상을 진탕하였으나 아직 병겁은 크게 없었나니

이 뒤에는 병겁이 전세계를 엄습하여 인류를 전멸케 하되 살아날 방법을

얻어 내지 못할 것이라. 그러므로 모든 기사묘법(奇事妙法)을 다 버리고 오직

비열한 듯한 의통(醫統)을 알아 두라.

내가 천지공사를 맡아봄으로부터 이 땅위에 있는 모든 큰 겁재를

물리쳤으나 오직 병겁만은 그대로 두고 너희들에게 의통을 붙여 주리라.

멀리 있는 진귀한 약품을 귀중히 여기지 말고 순전한 마음으로 의통을

알아 두라. 몸 돌이킬 겨를이 없고 홍수 밀리듯 하리라. (道典 7:24:2~7)


앞으로 전 인류가 진멸지경에 처한다. 다 죽는다.

상제님은 병겁이 있다고 하신다. 이 우주에 가을개벽의 본질적인 대변혁이 오는데, 그 궁극에 이르면 이름을 알 수 없고 원일을 알 수 없는 병이 들어온다. 이 괴병(mysterious disease)으로 모든 인간이 이유조차 전혀 알지 못한 채 다 죽어간다.

상제님은 항상 생장염장의 이법을 깔고 말씀하신다. 상제님 도법으로 보면 지금 인간이 맞이하고 있는 변화는 우주적 차원이다. 그것을 알기 쉽게, 명쾌하게 한 마디로 우주의 여름철이 끝나고 가을 추수기, 인간생명의 추수기로 들어간다고 하는 것이다.

이 우주일년의 문제는 시간 단위가 커서 이해를 못하고 인식이 안 되기 때문에 사실상 사람들이 잘 받아들이기 어렵다. 과연 그런 변화가 올 수 있는지를 되묻는다.

추수자, 우주의 주신(主神) 상제님

그럼 추수는 누가 하는 것인가?

그것은 주인이 하는 것이다. 이 우주에는 생명을 추수하는 주신(主神)이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투시타(도率天)의 천주님이다. 그 분은 궁극적으로 인간 역사에 새로운 깨달음을 가지고 오신 분이다. 미래의 부처라고 한다. 미래의 부처님은 생각하는 차원이 다르다.

‘어떻게 하면 우주질서가 바뀔 때 인간을 건지느냐? 어떻게 예수나 석가와 달리 새로운 방식으로 인간을 건지느냐?’ 이것만을 골똘히 생각하는 부처다. 그래서 미륵은 미래의 부처요, 생각하는 부처(thinking buddha)다.

기독교에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얘기한다. 아버지가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 분이 주신이다. 우리 생명의 주관자다.

동방문화에서는 서양의 하나님(God)에 대응하는 말이 제(帝)다. [주역]에 보면 신(神)에 대응하는 말이 제(帝)다. 임금 제 자가 아니고 하나님 제 자다. [주역] -{설괘전}에 보면, 2천 5백 년 전에 공자가 “제출호진(帝出乎震)이라.”고 했다. 제(帝)가 동방에서 오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동방에서 오신다. 하나님의 진리가 동방에서 나온다.

상제님은 과거 석가나 공자, 예수와는 다른, 한층 더 높은 무상의 지존 자리에서 인간 세상에 내려오셨다. 글자 그대로 상제님이다. 상제님은 예수가 말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our Father in heaven)’ 다.

동양에서는 예수가 오기 수천 년 이전부터 제(帝)로서 신앙했다. 통치자로서 우주를 다스리는 신으로서 하나님이 제다. [계시록]에도 보면 요한이 호천금궐(昊天金闕)에 계신 하나님이라고 한다. 그 분이 바로 상제님이다.

보라! 우주의 주재자 상제님이 인종 씨를 추수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셧다. 천지공사로 우주 질서를 뜯어고치고 새로운 우주를 열어 놓으셨다. 우리는 지금 증산 상제님이 누구이신지를 바르게, 또 사무치게 알아야 한다.

130년 전에 상제님이 인간 세상에 오셨다. 인간의 고통을 몸소 체험하시고 24세 때, 동방문화사에서 가장 큰 분기점을 이룬 사건인 동학혁명이 실패하고 조선 민중의 근대화에의 열망과 희망이 송두리째 무너지자, “내가 천하를 광구한다.고 선언하신다. 역사의 전면에 나선 것이다. 상제님은 27세 때부터 3년 동안 천하를 둘러보시고 30세 되시던 경자(庚子, 1900)년에 고향 땅에 돌아오신다. 그리고 ”모든 것을 뜻대로 할 수 있는 권능을 갖지 않고는 이 세상을 건질 수 없다. 이 세상은 신명조화가 아니면 도저히 건질 수 엇다.” 고 하시며 수행에 전념하신다.

그리고 다음해, 즉 20세기 첫 새벽을 울린 신축(1901)년 모악산 대원사 칠성각에 가서 도통 공부를 하신다. 21일 만인 음력 7월 7일날 도통문을 여시고 기유(己酉, 1909)년까지 새 우주를 여는 공사 의식을 집행하신다.

구체적으로 새 우주를 여는 프로그램의 완성! 그것이 천지공사(the work of renewing heaven and earth)다.

가을 생명으로 태어나는 태을주 수행

그런데 이 과정에서 상제님은 앞으로 새 우주에 들어가는 수행법, 인간 생명을 개벽해서 새로운 가을 생명으로 태어나게 하는 수행법을 전하신다.

상제님은 여덟 가지 기본 주문을 내려 주셨다. 그 가운데 제 1의 주문이 태을주다.

태을주란 무엇이며 왜 태을주를 읽어야 하는가?

우주의 여름에서 가을로 들어갈 때, 우주가 가을개벽할 때는 전 인류는 태을주를 읽어야 한다. 태을주를 알고, 태을주 생명을 받고, 태을주의 주신인 상원군님의 생명의 도(道)와 성령을 받아야 한다.

무엇 때문인가?

이것은 새 우주가 열리는 개벽 문제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인류역사의 진화, 발전과정으로 볼 때 역사의 궁극의 뿌리자리로 돌아가는 문제와도 관련되어 있다. 즉 원시반본(原始返本)의 문제 때문이다.

원시반본은 가을의 변화 질서다. 가을의 정신이다.

봄여름에는 생명이 성장한다. 씨앗이 발아(發芽)하여 싹이 올라오고 줄기가 뻗는다. 이파리가 무성해지고 아름다운 꽃이 핀다. 원시반본은 그렇게 열매 맺기전까지 줄기가 솟고 이파리가 무성해지고 꽃이 피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다. 궁극의 열매 맺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변화 질서다.

원시반본!

봄여름 동안 모든 뿌리에서 올라왔던 물기운이 가을의 시간으로 꺾어질 때 근원으로 돌아간다. 초목의 생명력인 물이 거꾸로 근원으로 돌아간다. 그 근원으로 돌아가는 과정이 원시반본이다. 근원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이파리가 떨어지고 열매를 맺는다. 이것이 중요하다.

원시반본이란 지구 1년의 가을뿐만 아니라 우주 1년의 가을에서도 그 변화 정신이 그대로 적용된다. 모든 생명이 원시반본하지 않으면 죽는다.

태을천은 바로 인류 생명의 뿌리하늘이며, 상원군님은 인류 생명의 뿌리다. 깨달음으로 가는 도통문화의 근원적 뿌리되는 분이다. 여기에 전 인류가 태을주를 읽어야 하는 절대 절명의 이유가 있다. 우주 가을에는 태을주를 읽어 생명의 근원으로 원시반본하지 않으면 다 죽는다.

수행은 성(性)과 명(命)을 회복하는 것

그러면 태을주는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태을주가 무엇인가를 살피기 전에 먼저 수행법의 가장 원론적인 것을 살펴보자. 수행이란 무엇이며, 수행법은 무엇인지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본다.

수행이란 인간의 몸을 통해 인간 생명의 시스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몸이 이 세상에 오기 전, 내 생명의 본원, 본래의 모습(original face)으로 돌아가기 위해 수행을 한다. 그러러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닦아야 하는가?

수행은 아까 내가 마음과 몸의 움직임을 닦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건 너무도 막연하다. 내 몸 생명의 구조에서 볼 때 무엇을 어떻게 닦아야 한다는 것인가?

이에 대해 유교, 불교, 도교, 기독교에서 전하는 아주 보편적인 것이 있다. 그것을 두 글자로 요약할 수 있다. 불교의 수행법이든, 유교의 수행법이든, 도교의 수행법이든, 기독교의 수행법이든, 생명의 근원으로 복귀하는 문제에 대한 것은 단 두 글자로 요약된다. 그것이 성(性)과 명(命)이다.

성(性)은 본성(本性)을 말하는 것이다. 내 생명의 본래 모습, 그 큰 근원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명(命)은 무엇인가? 명은 생명 명 자다. 또는 목숨이라고도 한다. 이 명을 인식하기가 어렵다. 성과 명은 좀 대조적인 성격이 있다.

자, 구체적으로 성은 무엇이며 명은 무엇인가? 우리가 직접 몸으로 수행할 때 성과 명이 어떻게 드러나는 것일까? 내 마음 속에서 내가 그것을 어떻게 느낄 수 있는 것일까? 왜 성과 명인가?

수행이란 궁극으로 들어가 보면 성과 명을 회복하는 것이다. 어째서 그 두 가지가 문제되는 것일까.

동양문화의 주제가 되는, 동양문화를 상징하고 대변하는 상징적인 어구가 있다. 바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다. [주역]-{계사전}에 나와 있다. 아주 중요한 구절이다.

일음일양지위도, 일음(一陰), 한 번은 음 운동을 하고 일양(一陽), 한 번은 양 운동을 한다. 이것이 생명의 길, 변화의 길인 도(道)다. 영어로는 ‘더 웨이(the way)'라고 번역하는데, 이 우주가 한번 음, 한 번은 양 운동을 하며 변화한다는 것이다.

우주의 가장 큰 길이 하늘과 땅의 길이다. 하늘은 양이고 땅은 음이다. 하늘 땅은 아버지 어머니와 같은 것이다. 인간세계에는 남자와 여자가 있다. 이것도 일음일양이다.

그런데 인간 생명, 인간 몸에는 일음과 일양이 다 있다. 이것은 혼음혼양(混陰混陽)이라는 뜻이 아니다. 일월지기(日月之氣) 하에서 태어나 음양이 혼잡하게 섞여 있는 것이 아니라, 진음진양(眞陰眞陽), 참 음과 참 양이다. 그 진음진양이 우리 몸 속에 있는 성과 명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몸에 있는 생명의 음양적인 두 가지 면, 가장 궁극적인 근원인 성과 명은 우주 생명의 길, 변화의 길인 도의 현상적인 두 갈래 면이다.

그러면 무엇이 음이고 무엇이 양인가?

그것은 우리가 수행을 해 봄으로써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다. 수도를 하면 누구든지 빛을 체험한다. 아주 확연하게 자신감이 생기면서 마음이 가라앉고 잡념이 없어지면서 수행이 집중적으로 잘 될 때가 있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집착하지도 않고, 있는 것에 빠지지도 않고 없는 것에도 빠지지 않고, 유도 무도 아니면서, 너무도 평안하고 내 몸의 안과 밖 구분이 없이 확 열려서 평안할 때가 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 대우주 자체와 하나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것이 [중용]에서 말하는 중화(中和, middie path and harmony)다. 그 때 밝음이 열린다. 그 밝은 모습, 내 생명의 본래 모습이 성(性)이다. 이 밝음은 양(陽)이다. 진양(眞陽)이다. 이 양은 밝고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인식하기 쉽다.

반면에 명(命)은 음(陰)이다. 진음(眞陰)이다.

이 우주 생명의 원초적인 모습, 그것은 저 맑은 가을 하늘 또는 봄날에 떠 있는 태양과도 같이 환하다. 하지만 눈부신 것이 아니다. 음광이다. 그러면서도 양광 못지 않게 밝다.

성은 양이고 명은 음이다.

그러데 명이 더 이해하기 어렵다.

상제님께서 인간의 몸 속에는 혼과 넋이 있다고 하셨다. 혼은 하늘에 올라가 신이 된다. 그러면 혼은 양이다. 넋은 땅으로 들어가 4대가 지나면 귀가 된다.

혼이 하늘에 올라가 신이 되는 것은 인식하기 쉽다. 그런대로 경험을 많이 한다. 밤마다 인간의 혼이 밖으로 나가 돌아다니잖는가. 그것이 꿈이다.

그런데 넋은 이해가 잘 안 된다. 우리가 수행을 통해보면 무덤으로 넋이 들어가고 나온다. 무덤가에서 해 떨어질 때 보면, 하얀 소복입고 다니는 것처럼 걸어나온다. 쉽게 얘기하면 정말로 맑고 하얀 아지랑이처럼 나온다. 이 넋과 같은 것이 명이다.


수행이 아니면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런데 인간에 깃들어 있는 생명의 본래 모습(primordial nature), 내 본래의 생명력인 성과 명은 하늘 땅과 같다.

인간이 어머니 뱃속에서 엄마와 더불어, 천지와 더불어 자연과 더불어 호흡할 때 성과 명은 하나다. 즉, 엄마 뱃속에서 열 달 동안 몸을 받을 땐, 내 생명의 원초적인 가능성, 내 생명력은 우주와 같다. 그 땐 모체와 더불어 복식호흡을 한다.

그러나 엄마 몸에서 나와서 탯줄을 끊는 순간, 인간적인 호흡으로 가 버린다. 가슴호흡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본래 우주와 하나인 성과 명이 둘로 분리된다.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거대한 우주적인 어둠에 휩싸이다. 눈 뜨고도 이면의 세계를 전혀 못 본다. 이 우주를 비추고도 남을 만큼 밝은 내 생명의 본래 모습, 내 마음의 근원인 성이 후천적인 성으로, 어둠의 세계로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또한 하늘같은 무한의 생명력인 내 명이 불과 몇십년 살다가 병들어 죽는 유한의 명자리로 떨어진다. 그 때문에 온갖 인생의 시련, 고난의 파도, 역경과 슬픔, 질병 속에서 살다가 죽음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면 수행이란 무엇인가.

수행은 내가 어머니 뱃속에서 가지고 있었던 본래의 성과 명을 회복하는 것이다. 내 생명의 근원인 성과 천지와 같은 내 본래의 생명력인 명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것은 대단한 것이다. 사실 수행이란 인간으로서 더 이상이 없는 행위다. 수행이 아니면 내 생명의 본래 모습을 회복할 수 없다. 내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갈 수 없다. 원시반본의 문제로 볼 때, 내가 세상에 태어나 살면서 사업하고 인생을 즐기거나, 인간적인 꿈을 이루거나, 정치나 경제, 사업이나 학문, 또는 예술이라는 어떤 명분으로 일한다 해도, 그것은 전부 두 번째 세 번째 문제다. 부차적인 것이다.

우리는 왜 이 세상을 사는가?

인간으로 태어난 궁극 목적은 내 생명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을 인식 못 하고 찾지 못하고, 아무 관심 없이 중생들처럼 살다가 가면 어떻게 되는가? 수행을 하지 않고 유한의 명과 닫혀져 있는 어둠, 후천적인 성 속에 산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왜 인간이 도를 닦아야 하는냐? 또 도를 닦으면 우리의 생명이 어떻게 되고, 안 닦으면 어떻게 되느냐?’

상제님은 이에 대해 아주 쉽고도 명쾌하게 말씀하고 계신다.

* 도(道)를 잘 닦는 자는 그 정혼(精魂)이 굳게 뭉쳐서 죽어서 천상에 올라가

영원히 흩어지지 아니하나 도를 닦지 않는 자는 정혼이 흩어져서 연기와

같이 사라지느니라. (道典 9:29:1~2)


참 재미있는 표현이다. 도를 잘 닦는 자는 정혼이 굳게 뭉쳐서 영원히 그 생명이 흩어지지 않는다. 어떻게 된다는 것인가? 본래의 명(命), 하늘 땅 우주와 같은 생명력을 회복한다는 것이다.

야, 이것보다 더 큰 자산이 어디 있는가. 이 세상을 사는 범부들도 건강을 제일의 가치로 얘기한다. 30대 40대 50대 나이가 들수록 누구도 이렇게 얘기한다. “건강이 최고다, 병 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재산이 천금만금이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건강하지 않으면 다른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또한 마음이 즐거워야 하고 밝아야 한다. 우리 생명이 밝고 즐겁고 건강하다! 이게 전부 성과 명의 문제다. 동서고금의 모든 성자들의 생명에 대한 가르침, 우리 삶에 대한 가르침도 결국은 성과 명에 관한 것이다.

고생이 따르더라도 생명을 늘려가야

그러면 “도를 잘 닦는자는 정혼이 굳게 뭉쳐져서 영원히 흩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에서 정혼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일까?

그것은 정(精)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삼신 수행법에서 말하는 게 성과 명 자체를 닦는 것이 아니다. 정에서 닦아야 한다. 정을 근본으로 해서 닦아야 한다. 상제님이 말씀하신 정혼을 근본으로! 이 정혼이 굳어지면 영원히 흩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선천 문화는 정을 파괴하는 것이다. 남자의 정을 파괴하고 여자의 정을 파괴한다. 문화가 전부 그렇다. 의식주 문화가 다 그렇다. 자연환경, 생태계 파괴는 물론 성(性) 문화 술 먹는 문화, 음식문화 이 모든 것이 정을 파괴하고 정을 분열시킨다. 정이 순화가 안 된다. 그래서 공부가 안 된다.

결국 수행의 본론으로 들어가 보면, 정을 어떻게 굳힉 어떻게 맑게 정화하는가 하는 문제로 떨어진다.

상제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

이 세상을 사는 데 걱정이 없는 사람은 문제의식이 없다. 사업 잘 되고, 가정 편안하고 자녀들 말 잘 듣고 모든 게 잘 돌아간다? 서로 마음 맞아 즐겁고, 일이 끝나면 집에만 가고 싶다?

그러면 아무런 문제의식을 못 갖는다.

뭔가 현상적인 질서가 기울어져 위기의식을 느끼고, 역(逆)이나 극(克)을 받아 시련에 처해야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그런 좌절 속에서 깊은 슬픔과 한(恨)을 느끼게 된다. 우리 동방 민족의 가장 중요한 정서가 한 아닌가.

한을 영어로는 딥 그리프(deep grief, 깊은 슬픔)라고 번역하지만, 본래의 한의 뜻과는 좀 다르다.

원과 한이 많고 깊은 사람이 본질을 생각한다. ‘나는 왜 이런가! 왜 이 정도인가!’ 이렇게 근본을 묻는다. 그리고 생명의 근원을 향해 걸어가게 된다. 원한은 방향전환의 촉진제다.

상제님도 “비록 고생은 따를지라도 영원히 생명을 늘여 감이 옳은 일이요, 일시의 쾌락으로 길이 생명을 잃는 것은 옳지 않느니라. (道典 9:120:1)”고 하셨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쾌락을 추구하는 게 아무리 즐겁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생명을 죽이는 것이다. 고통이 있더라도 생명을 늘여감이 옳은 일이다.

이 말씀은 쉬운 것 같지만, 성과 명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주 중요한 말씀이다. ‘비록 고생은 따를지라도 영원히 생명을 늘여감이 옳은 일이요 일시의 쾌락으로 길이 생명을 잃는 것은 옳지 않으니라.’ 생명을 잃는다는 것은 모든 것의 종말 아닌가. 인생의 종말! 한 인간 생명의 궁극적 종말은 생명을 잃고 죽는 것이다.

성명은 유형적으로는 정(精), 무형적으로는 마음(心)

성과 명을 닦는 것을 유형적으로 얘기하면 우리 몸에서는 정의 문제다. 정이란 남자의 정자, 몸에 호르몬, 골수라는 개념을 포괄하는 것이다. 여자의 경우도 똑같다. 난자나 신장의 정수, 오장육부에 다 들어있다. 남녀 불문하고, 정의 기능에 의해 오장육부가 돌아간다. 정이 충만하면 소화도 잘 되고 잠도 푹 자고 몸이 팽팽 잘 돌아간다. 병에도 안 걸린다. 하지만 정이 파괴되면 모든 것이 끝난다. 단명하거나 온갖 병이 들고 천지에 사마(邪魔)가 날뛴다.

그런데 무형적으로 성, 명, 정을 닦는다는 것은 성, 명, 정을 다스리는 운전자인 마음을 닦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마음이란 무엇인가? 마음을 어떻게 닦아야 하는가?

상제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다. “사람 마음이 천층 만층 구만층이니 제각기 다 다르니라. (道典 8:2:6)”

답사하면서 내가 이 말씀을 들었을때, ‘야, 참 표현이 아주 쉬우면서도 인간 문제의 근본을 지적해 주시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태고 이래로 지금까지 똑같이 생긴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이다. 인간 마음이 천 층 만 층 구만 층이다.

이것은 상징적인 수로 말씀하신 것이다. 인간마다 층이 다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와 배우고 들은 지식, 창조적인 수준이 다 다르지 않은가. 실제 인간의 의식 세계에 들어가 보면 인간의 마음 닦인 수준이 수억만 층이다.

그러면 마음이란 무엇인가?

불가에서는 청정심(淸淨心)을 얘기한다. 맑고 깨끗한 마음. 청정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자아가 갈라지고 혼탁한 마음, 번뇌망상, 고달프고 괴롭히는 마음은 죽음의 길이다. 어둠의 길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타락은 마음이 뱀의 혓바닥처럼 갈라져 뿌리를 못 내리는 것이다. 외부로부터 유혹에 빠져서 사물을 바르게 인식 못 하는 것이다. 정신이 갈라져서, 자기의 정기를 빼앗기고, 자기 생명이 자기 주인 노릇을 못 하고 노예화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면 청정심(淸淨心)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내 생명의 본래 모습, 나의 근원에 머무는 참 마음을 말한다. 본래의 내 생명의 빛의 세계, 우주의 대광명인 성, 본래의 성에 머무는 것, 내 마음의 근원인 성에!

여기서 성(性, Nature)과 심(心, Mind)의 관계를 잘 알아야 한다. 마음의 근원이 성이다. 마음으로 작동하기 이전, 발현되기 이전 본래의 근원이 성이다. 성은 본체이고 작용해서 드러나는 게 마음이다.

또 구체적인 마음이 완전히 드러난 것을 정(情, Feeling)이라고 한다. 정은 눈으로 본다, 듣는다. 마신다고 하는 현상적인 의식 작용이다. 신(身)의 작용이다. 또 마음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성과 정의 주인 노릇을 한다.

이 마음의 세계에 눈 뜨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음은 무형이다. 어떤 공간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게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계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오직 느낌의 세계다. 내가 순간적으로 ‘야 그렇구나!’하고 깨달음이 오면 의식이 확 터지면서 기쁨이 샘솟는다. ‘아! 생각을 잘못 했었구나. 내가 이 세상을 잘못봤구나.’ 이렇게 순간적으로 한 생각 바뀌어 버리면, 몸에서 희열이 솟아나면서 생명의 건강을 되찾는다. 본래의 명, 생명력을 순간적으로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생명의 메시지를 잘 받으면 일주일 만에 죽는다는 사람이 몇 달 더 살 수도 있고 몇 년을 더 살 수도 있다. 천지의 생명력을 회복하므로, 생명세계에 기적이 일어난다.

이렇듯 우주와 같은 본래의 내 생명력이 유전자를 통해 발동된다. 내 몸 속에 있는 우수한 유전자들의 스위치가 열려서, 거기서 무한의 생명력이 작동되어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평소 자기 마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라.

‘내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내가 지금 무엇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는가? 그 생각은 합리적인가? 과연 바른 생각인가? 이치를 벗어나지는 않았는가? 헛된 욕망은 아닌가?’

이런 것에 대해 곰곰이 들여다보고, 자기와 대화하고 자기 자신을 깊이있게 근원에서 볼 수 있는 철저한 참회의 생활이 중요하다. 큰 관심을 갖고 나를 들여다 보아야 한다. 그게 결국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 무엇이 참된 길인가?’에 대해 근원적인 깨달음을 얻는 길이다.

성과 명을 회복하는 내 몸의 밑천, 정(精)

그러면 올바른 수행법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건강, 삶과 죽음의 양 경계를 넘어서는 생명의 궁극 문제는, 내 생명의 본래 모습인 본성을 회복하고, 그 다음 내 본래의 생명력인 명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유한이 아닌 시간 수, 단지 몇십 년 몇백년이 아니라 시작도 끝도 없는 우주와 더불어 영원히 사는 것이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나오면서 본래의 성과 명이 분리되었다. 그것이 합해져 있는 하나의 경계자리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내 생명력이 우주와 더불어 하나인 영원의 경계, 그것은 무한의 광명 자체다.

성과 명이 하나가 된다! 밝은 모습 자체는 성이고, 그 모습이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한 것, 그것을 하나의 생명력으로 표현할 땐 명이다. 그것을 느낌으로 알아야 한다.

내가 그 경계를 보았기 때문에 자시있게 얘기한다. 그것은 상제님이 그냥 보여 주신 게 아니다.

내가 [도전]작업하고 나서 일 년 동안 7일, 21일, 49일, 백일 반복 기도할 때, 일 년 동안 하고 나서도 계속 몸을 못 가누니까, 상제님이 앞으로 받을 도통 경계를 미리 체험해 보라고 해서 열어 주셨다. 우주의 성과 명이 하나로 보였다.

자, 그러면 바른 수행법은 무엇인가?

이 문제를 알기 위해, 어린시절부터 청년기, 중년기, 노년기로 가면서 우리 몸이 변화해 나가는 것을 보자.

어릴 때는 몸이 보드랍다. 어린애의 손목을 잡아보면 살결이 아주 보드랍다. 어린아이들 두세 살짜리 기저귀 갈아주고 엉덩이를 만져보면 뽀송뽀송하니 촉감이 좋다. 순수한 양의 덩어리다.

그런데 이것이 자라면서 음 기운이 들어가 차츰 굳어지고 거칠어진다. 그것이 노화현상이다. 그러면서 죽는다. 양기가 사라지고 음기로 꽉 차서, 굳어서 죽는 것이다.

어린애들은 양기로 꽁꽁 뭉쳐진 불덩어리 아닌가. 어린애들은 양기로 꽁꽁 뭉쳐진 불덩어리 아닌가. 어린애들은 눈이 내려도 나가서 좋다고 뛰어다닌다. 우리 어렸을 때에도 그랬다. 십대 때, 아침에 눈이 내려 영하 20도인데도 우통을 벗고 세수한다. “아, 시원하다!”고 하면서. 그러면 우리 아버지가 “참, 좋은 때다.” 그러신다.

바른 수행법의 핵심은, 내 본래 모습인 성과, 내 본래의 무궁한 생명력인 명을 회복하는 것이다. 성과 명을 회복하는 가장 기본이 되는 에너지 자본이 내 몸 속에 있는 정(精)이다. 영어로는 에센스(essence)라고 한다.

이건 생식적인 에너지인 정자(sperm)과 난자(egg), 오장육부의 정, 뼛속에 있는 골수, 또는 뇌속에 있는 뇌수, 호르몬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수승화강(水昇火降)이 되어야

이 정을 어떻게 닦아야 하는가? 어떻게 이 정을 잘 저장하고 뭉쳐서 건강하고 정신이 명료하고 한 평생 죽을 때까지 병에 안 걸리고 살 수 있는가?

이것이 수행법의 첫걸음을 떼는 문제이면서 궁극의 문제요, 알파와 오메가 문제다. 여기에는 유교, 도교, 기독교, 불교의 구분이 없다.

서양 기독교로 들어가 보자. 수행에 대한 한 가지 예수의 명언이 생각난다.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일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한복음 43:3)


니고데모가 예수에게 묻는다.

“어떻게 하면 거듭날 수 있습니까?”

인간은 세상을 살면서 욕심에 사로잡혀 죄 짓고 어둠 속에 갇혀 살다가 죽는다. 애 낳고 기르며 한 가정 꾸리고 껄떡껄떡하다가 앞서거니 뒷서거니 저 세상으로 간다. 유형적으로 영원한 ‘나’라는 존재는 없는 것이다. 누구도 죽는 것이다.

그래 니고데모가 “유한의 내 생명이 어떻게 유한의 벽을 무너뜨리고 무한의 생명으로 거듭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중생의 길이 무엇입니까?” 하고 묻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머리가 안 돌아가서 “엄마 뱃속에 들어갔다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까?”하고 묻는 것이다.

예수가 대답한다.

네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세계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그러면 물과 성령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수행을 하다보면 현상적인 내 몸의 질서, 음양의 두 기운, 물과 불인 내 생명의 에너지 질서가 뒤집어진다. 신장에 있는 물 기운이 위로 올라가고 심장에 있는 불기운이 아래로 내려간다. 한마디로 수승화강(水昇火降)이다.

[주역]에서도 천지비(天地비)괘가 지천태(地天泰)괘로 완전히 천지개벽해서 뒤집어진다고 한다. 그렇게 수승화강이 되면 잠을 덜 자도 정신이 맑고 항상 무슨 일을 해도 자신감이 넘친다. 또 ‘아 이 일을 하면 안 된다 이것은 실패한다 원칙에 어긋난다.’ 는 것을 안다. 그것을 천지에서 가르쳐 준다. 그것은 하지 말라고.

여기 지금 예수의 얘기도, 성령과 물로 거듭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물이란 무엇인가?

인간 몸 속에 있는 본래의 명, 천지의 생명과 같은 본래 나의 생명이 물이다. 우주의 생명력은 물이다. 태극수(太極水). 우주의 생명 자체가 물이다. 인간도 88%가 물이다.

내 생명을 이루는 가장 근본이 되는 게 음양적으로 물과 불이다. 그런데 이 불이 사실은 성령과 같은 것이다. 환하고 밝다. 그러면 성령 따로 있고 물 따로 있는가? 아니다. 둘은 얽혀 있다. 엇갈려 있다. 물 속에 불이 있고 불 속에 물이 있는 것이다. 수중지화(水中之火)하고 화중지수(火中之水)란 말이다.

그러니까 수승화강이 되어 환히 밝아지면 불이다. 그것이 성령이다. 원래 우주의 본성, 즉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생명력 속에서 일어나는 밝은 광명, 나의 본래 모습, 환하게 우주에 꽉 차 있는 것, 우주의 법신으로 뻗쳐있는 광명, 만물에 무한의 은혜를 열어주는 우주의 대생명력, 그게 불이며 성령이다. 우주와 내 몸이 하나가 된 것이다.

정(精)을 쏟지 말라

그것을 석가는 뭐라고 했는가.

석가가 연꽃을 들고 심인(心印, mind seal)을 전한다. 미소를 딱 짓고 있으니까 가섭이 그것을 깨닫고 미소짓는다. 가섭은 왜 미소를 지었으며 미소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도대체 무엇을 깨달았다는 것이가? 스승이 연꽃을 들고 있는데.

석가는 가섭의 마음자리에서 일어나는 깨달음의 기쁨을 교감해서 안다. ‘아, 네 놈이 제대로 알고 있구나.’ 그 연꽃이 사실은 도통(道統)을 전하는 상징이다. 시험을 보는 것이다. 석가가 보니까 가섭이 제대로 알고 기뻐하고 있다. 그래서 도통의 상징으로 가섭에게 황금가사를 전한다.

석가가 죽자 제자가 찾아 와 운다. 부처님 몸이 금강신인데 어떻게 이렇게 허망하게 돌아가시느냐고 그러니까 석가가 관 밖으로 다리를 내놓고 흔들었다는 것이다.

“불신간아(不信看我)면 족지각(足知覺)이라. 나를 보고 못 믿으면 다리를 보고 믿으라.”고.

또 석가 제자 아난이 태모님 성도 전선필처럼 한 번 보면 잊지 않고 기억을 잘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석가의 가르침을 결집(結集)할 때 가섭이 아난을 빼 버린다. 너는 이론적으로만 깨진 놈이지 마음이 열리지 않았다고, 한 방 갈긴다. 그렇게 혼구녕 나고 발심(發心)해서 의식이 열린 뒤에 불려 들어가 결집에 참여한다.

이 때 아난이 가섭에게 “스승님께서 전수하신 금강가사 외에 전수 받으신 것이 있습니까?” 하고 묻는다. 그러니까 가섭이 “문 앞에 찰간을 거꾸로 세우라고 하셨지.”하고 대답한다. 이게 도각찰간(倒閣刹竿)이라는 화두로 전해 내려오는데, 가장 유명한 화두 가운데 하나다. ‘문 앞에 찰간을 거꾸로 세우라.’는 것이다. 찰간이란 절에 가 보면 산문 앞에다 세워두는 것이다. 찰간이란 절에 가 보면 산문 앞에다 세워두는 깃대 같은 것이다. 그것은 곧 성기(性器)를 상징한다. 그것을 거꾸로 세워라. 쉽게 얘기하면 네 몸에 있는 자지와 보지를 거꾸로 세우라는 얘기다.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의 길로 나아갑니까?”

부처님이 이에 대해 도각찰간하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우리말로 하면 너의 생명의 근본인 정을 환원시켜라. 근원으로 돌려라. 네 자지의 힘, 보지의 힘을 땅으로 쏟아내지 말고 거꾸로 쓰라는 것이다.

재미있지 않은가? 너의 좆을 거꾸로 세워라.

삼천 년 전, 석가의 최후의 가르침이 너의 좆, 보지를 거꾸로 세우라는 것이다. 그게 우리들 인생의 최대공사다. 너의 생명의 본원을 쏟아내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가 부처가 되고 깨달음을 얻는 길, 불성을 회복하는 길이 바로 여기에 있다. 불성이라는 게 본래의 성 아닌가. 유가에서 말하는 천성이든 불가에서 말하는 불성이든 기독교에 말하는 하나님의 왕국, 천국, 즉 아버지의 영원한 생명 세계로 가는 길이든, 다 같은 말이다.

예수도 천국이 네 마음 속에 있다고 했다. 영원한 생명 세계, 빛의 세계, 하나님 나라 천국을 얘기하면서, 그것이 네 마음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상제님은 구체적으로 정혼을 굳히는 데 있다고 하신다. 정을 굳혀야 혼귀(魂鬼)가 하나가 되어 영원해 지는 것이다.

유형적으로 볼 때 이렇듯 내 몸에 있는 생명의 중심축 역할을 하는 정이 문제다. 따라서 그것을 변화하게 하는 주인공인 내 몸과 마음을 닦는 것이 수행이다. 무형인 마음과 유형인 정을 닦는다. 수행은 마음과 정을 닦아 성명의 본래 자리로 들어서는 길이다.

그러니까 현실적으로 돌아오면 마음 닦는 문제로 떨어진다. 마음을 바르게 가짐으로써 정이 변화된다. 정이 굳어지고 맑혀지고 승화된다. 그러면 그만큼 내가 높은 성과 명의 세계로 진입해 들어가는 것이다.

일심을 가지라

자, 그렇다면 마음이란 무엇인가? 마음의 작용은 또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성명은 어떻게 닦아야 하는가? 결론은 간단하다. 태을주를 읽으면 된다. 태을주를 읽으면 이 공부와 더불어 마음의 세계가 새로운 경계로 열린다.

이 마음이란 무엇인가? 마음 닦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마음은 형상이 없다. 마음은 허공과 같다.

옛날에 청담스님이 이런 예를 들었다. 30년 전에 우리집에 돌아다니는 [마음의 세계]라는 책을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지금 순간적으로 생각나는 구절이 있다.

“그대가 허공에 페인트를 칠하면 칠해지지 않듯이 우리 마음도 그와 같다. 그 무엇에도 오염되지 않는 것이 우리 마음의 본성이다.”라는 내용이다. 어린시절 그 책 한 페이지를 열고 읽은 것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마음의 본성은 지금 우리가 상제님 법담을 나누고 있는 이 곳 불빛처럼 밝다. 그게 우리 생명의 본체인 마음의 본래 모습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 몸 속에서 작용하는 마음, 의식의 변화는 헤아릴 수가 없다. 그것은 어떻게 우리가 따지고 분석해 볼 수도 없이 무량한 변화를 일으킨다.

[도전]을 보면 마음에 관한 상제님 말씀이 많다. 아까도 말했지만 “사람 마음이 천층 만층 구만층이니 제각기 다 다르니라. (道典 8:2:6)” 상제님 유언도 있다.

* 너희들이 큰 복을 구하거든 일심(一心)으로 나를 믿고 마음을 잘 닦아 도를

펴는 데 공을 세우고 오직 의로운 마음으로 두 마음을 두지 말고 덕 닦기에

힘써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라. (道典 10:49:1~2)

내가 상생(相生)의 도로써 만민을 교화하여 세상을 평안케 하려 하나니 새

세상을 보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요, ‘마음 고치기가 어려운 것’이라.

이제부터 마음을 잘 고치라. (道典 2:56:9)


우리가 세상을 살아 오면서 몸에 젖은 습성이 있다. 제 2의 천성처럼 굳어진 습관, 고질적인 병이다. 가령 ‘오늘은 좀 적게 먹고 잠을 푹 자고 새벽에 일어나 맑은 정신으로 수행 좀 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집에 돌아가 식탁에 앉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까맣게 잊어버린다. 숟가락 한 번 잡았다 하면 밥 한 그릇 다 먹어치우고, 거기다가 간식까지 먹고는 맹꽁이 배를 하고 잔다. 그러고 아침에 늦으막하니 일어난다. 그렇게 해서 하루를 또 그냥 넘긴다. 잘 못 고친다. 그게 젊어서 식욕이 좋아서 그런 게 아니다. 일종의 습관이다.

“육임을 짜야지?” 하고 손 들어 보라고 하면 “네!” 하고 손 드는데, 돌아서서 며칠 지나고 나면 다 잊어버린다. 그것도 고질적인 습관이다.

상제님이 “우주가 종어일심(終於一心) 시어일심(始於一心)이라.”고 하셨다. 일심이 아니면 우주도 없다.

분열되는 마음 극복

마음이란 무엇일까?

인간의 본래 마음이란 분열되어 어떤 생각을 일으키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 시방삼세를 번갯불처럼 막 오가는 마음이 아니다. 복잡한 생각을 일으키는 마음이 아니다. 우주만유와 하나 되어 있는 상태다.

우주와 하나인 이 마음의 본래 모습을 들여다 보고 그 경계를 보는 것은 일생 일대의 천지대사이다.

인간의 본래 마음은 한 생각에서 경계가 무너진다. 인간의 한 생각 한 마음에서 우주도 나왔다. 또한 인간은 그 한 생각에 의해 죽는다. 한 생각에 사로잡혀서 오만가지 생각이 물끓듯 일어나는 것이다. 여기서 한 마음, 한 생각이란 무한의 잡다한 번뇌망상을 상징하는 말이다.

우리 본래의 마음은 그게 아니다. 우주만유와 하나가 된 일심, 성과 명이다.

마음을 닦는다는 게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가?

인간은 이 세상을 살면서 문명을 지어낸다. 인위적으로 뭔가를 만들어내고 추구한다. 현실적으로 인간생명이 추구하는 목적이 있다.

인간적인 목적이란 물질을 소유하거나 개인적인 꿈, 야망을 성취하는 것, 가령 돈을 많이 버는 것, 학문적으로 성공하는 것 따위를 말한다.

그러나 그런 일을 저지르는 내 본래의 생명은 반대 급부적으로 근원으로 돌아가려는 성향이 있다. 상제님도 “사람의 본성이 원래 어두운 곳을 등지고 밝은 곳을 향하나니 이것이 곧 배서향동(背西向東)이라. (道典 2:104:2)”고 하셨다. 지구촌으로 말하면 서쪽이 등쪽이고 전면이 동쪽이다. 해가 동쪽으로 떠서 서쪽으로 가듯 인류의 새 역사도 동방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상제님이 동방땅에 오시게 되었다는 말씀이다.

사람은 본래의 자기로 돌아가기를 희구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게 안 된다. 우리는 양 극단이 충돌하는 모순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생명의 궁극, 그런 기쁨의 세계, 편안하고 밝은 광명으로 가고 싶은 반면에 다른 한 쪽으로는 그게 아니다. 진탕 놀고 떠들고 즐기고 쾌락을 추구하는 쪽도 향유하고 싶어한다. 그런 모순된 성향이 현실생활에서 충돌한다.

이것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궁극은 이치를 깨달아야 한다. 우주의 원리, 자연의 이법, 인간생명의 구조적인 문제를 이치로 터득해서, ‘아, 그렇구나!’ 하는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그것을 이통(理通)이라고 한다. 사무치게 근본 이치를 뚫는 만큼, 즉 사상무장이 된 만큼, 심법 훈련이 되고 마음 닦는 기초가 마련되는 것이다.

천지 일심을 가진 자가 개벽세계의 주인

마음 다스리는 것도 이법을 알아야 한다. 심리 작용, 마음이 작용하는 데에도 이법이라는 게 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두 얼굴이다. 곧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다.

우리 마음의 음양의 두 얼굴, 하나의 본성적인 면, 본래의 내 마음이다. 이것을 상제님은 일심(one mind)이락 하셨다. 그러면 ‘내가 일심을 가졌다.’고 할 때 일심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상제님 말씀을 보자.

* 일이 금방 된다고 해도 천지 일심으로 하나가 되어야 이이 되느니라.

(道典 8:14:12)

이것은 ‘너희들이 일심을 가져야 개벽을 깨우친다. 그래야 너희들이 개벽세계의 참 주인이 되어 그 세상을 건설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상제님이 말씀하시는 일심은 천지 일심이다. 한 마음, 나의 본래의 마음, 모든 생명의 마음, 이 우주의 근원적인 마음, 이것이 일심(one mind)인데, 그것은 바로 천지 일심을 말한다.

천지 일심은 두 가지 뜻이 있다.

첫 번째는 하늘 땅은 한 마음 뿐이다. 천지는 일심뿐이다. 곧 천지지심(天地之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나와 하늘 땅의 관계를 얘기하면서 “내가 천지와 한 마음이 되었다.”고 할 때, 바로 천지의 생명과 하나가 된 마음을 말한다. “내 마음이 바로 천지의 마음이다. 나는 하늘 땅과 하나가 되었다.”고 할 때의 마음이 천지 일심이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 이런 심법을 가진 사람이 천지사업을 하는 것이다.

천지일심을 가지면 개벽되는 것을 본다. 자다가도 보고, 눈만 감으면 우주가 개벽해서 세상이 넘어가는게 다 보인다. 수도만 해서 보이는 게 아니다. 이것이 심법의 문제다.

본래 마음자리에서 볼 때, 성명이 하나로 일치되어 있는 경계가 일심이다. 하늘 땅이 하나 된 것이 일심이다.

모든 성과 명의 뿌리가 하늘 땅이다. 모든 생명의 어머니 아버지가 천지다.

마음이란 무엇인가?

불교에서는 곧잘 마음을 바다에 비유한다. 마음에는 두 문이 있다. 하나의 진리 자체인 진여문(眞如門)으로, 진여문은 잔물결 하나 일지 않는 명경지수와도 같은 마음이다.

또 하나는 거기서 파도와 같이 일어나는 또 다른 현상적인 마음이다. 바람이 불어오면 그것이 원인이 되어 파도가 친다. 인간의 마음 현상에서 번뇌와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을 생멸문(生滅門)이라고 한다. 마음이 일어났다가 멸하고 일어났다가 멸하면서 마치 파도치는 것처럼 생각이 수시로 일어나 변화한다.

그러면 파도와 물은 둘인가?

아니다. 하나다. 그 자체가 물결이다. 진여문과 생멸문!

그러니까 내 마음의 본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깨져서 보면, 내가 어떤 생각을 해도 그 자체가 진리의 물결이다. 우주의 생명으로서 부침하는 것이다.

마음이 그런 경계로 인식되고 본래 모습을 볼 수 있다면, 마음이 양면으로 부침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고 볼 수 있다면, 이미 깨달음의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부처가 될 수 있는 기초를 갖춘 것이다.

마음 닦는 것은 성⋅명⋅정 세 요소를 닦는 것

그러면 마음 닦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마음 닦는다는 게 과연 맞는 말인가?

혜능이 나무꾼 노릇 하다가 절간에 가서 보니 신수(神秀)가 개소리를 써 놓았다. 닦아서 제대로 빛깔을 내야 한다고 시를 걸어 놓았다. 혜능이 보기에 웃기는 얘기 아닌가! 깨진 놈이 보면, 본래 바탕이 맑은데, 원래 깨끗하고 대우주적인 광명으로 꽉 차 있는데, 닦을것이 무엇이 있는가?

또 우리의 마음 바탕이 실체가 아닌데 무엇을 닦는다는 말인가? 닦을 대상이 있는가?

이게 대단히 중요하다. 의식이 성숙되어야 보이는 것이다.

내가 이제껏 마음 닦는 것을 성과 명 닦는 것으로 이야기했다.

그런데 증산도 후천선경의 개벽문화에서 보면 성과 명은 정으로써 닦는 것이다. 성이 근본이다. 성은 무형적인 것이다. 그리고 유형적인 것이 있다. 그게 명이다.

현실적으로 성은 마음으로 작용하고 이 마음은 기와 일체가 된다. 또 명을 닦는 것은 내 몸을 닦는 것이다. 명은 내 몸의 기로 작동되는 것이다. 곧 내 생명력을 기른다는 것은 기를 보충하고 회복하는 것이고 기를 맑히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 닦는다는 것은, 공부법으로 보면 내 생명의 기반이 되는 성⋅명⋅정(性命精), 세 요소를 닦는 것이다. 이것을 구체적인 작용 요소로 보면 심기신(心氣身)이다. 마음과 기와 몸을 닦는 것이다.

내 몸을 닦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정을 닦는 것이고 마음 닦는다는 것은 마음의 뿌리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원래의 생명력을 회복한다는 것, 하늘땅의 무한의 생명력을 회복한다는 것은 내 몸이 기를 닦는다는 것이다.

감정을 통제하라

그러면 왜 공부가 안 되는가?

이것을 소주제로 걸어놓고 몇 가지를 정리해 보자. 공부가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내 생명의 주인인 마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마음의 본성은 대우주 광명 자체다. 우주의 태양과 같은 시작도 끝도 없는 대광명 자체다. 그런데 이것이 내 몸이 엄마 뱃속에서 하나의 개체로 분리되는 과정에서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온갖 생각을 일으킨다. 사물을 보고 분별작용을 한다. 의식이 찢겨져서 전체를 하나로 못 본다. 전체와 유리된다. 그래서 기가 탁하다.

그것은 세상에서 아무거나 섭취하기 때문에도 그렇다. 환경적인 문제도 크다. 아무리 자기가 마음 잘 닦고 도덕적인 일을 하고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탁한 기운을 주는 음식물을 먹으면 이게 무너지는 것이다.

기는 무형이고 몸은 유형이다. 더 구체적으로 보면 공부가 안 되는 이유는, 내 몸을 구성하고 있는 생명의 기본 요소들의 상호관계를 모르기 때문이다. 즉, 마음을 억제하지 못하고 조절 못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내 마음을 조절하는가?

후천적으로 성질이 급하다거나, 과격하다거나, 소심하다거나 여러 유형이 있다. 만일 그대가 내성적이라면 이것을 어떻게 조절해야 큰 마음을 가질 수 있는가? 모든 만물과 하나 되어 평화롭고 과감하고 생명력있고, 누구를 절대 해하지 않는 큰 마음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그것은 현실적으로 내 감정을 통제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구체적으로 작동되는 건, 호흡으로 된다. 숨쉬는 것(breathing)으로 된다.

마음은 호흡과 연관되어 있다

수행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내 생명의 진액, 생명활동의 근원, 또는 핵과 같은 정을 잘 갈무리하는 것이고, 정을 잘 저장하고 그것을 굳히고 맑히는 일이다. 그 주인되는 마음을 통제해서 정을 순수하게 하고 굳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내 마음은 무엇과 연관되어 있는 것일까? 좀더 현실적인 개념으로 들어가 보자.

희로애락이라든지 하는 감정을 일으키는 것은 불가에서 말하는 것처럼 육식(六識),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 오관(五官)의 느낌과 의식의 연관이 있다. 이것은 직접적으로 호흡에서 작용한다. 결국 내 마음은 내가 숨쉬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숨쉬는 것이 생명이다.

석가가 한 제자에게 물었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동안 있느냐?”

“며칠 사이에 있습니다.”

“너는 아직도 도를 모른다.”

또 다른 제자에게 물었다.

“호흡하는 사이에 있습니다.”

“네가 도를 제대로 알았다.”

42장경에 이 얘기가 있다.

사람 목숨이 어디에 있는가? 호흡하는 사이에 있다. 숨 쉬는 사이에 있다는 것이다.

명이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숨 쉬는 것에 있는 것이다.

내가 아까 일음일양지위도라고 했다. 모든 생명적 현상, 일체의 우주변화 현상에는 음양이라는 두 측면의 변화가 있다. 일음과 일양하는 두 면, 그것이 바로 도다.

생명의 기본 요소를 현실적인 개념으로 보면 바로 내 마음이라고 하는 세계가 있다. 이 마음이 실질적으로 생명운동을 하며 몸의 시스템으로 작동할 때는 들숨날숨, 일음일양의 내쉬고 들이쉬는 호흡 작용을 한다. 명은 수명이다. 내 숨이 딱 떨어지면 명이 끝나는 것이다.

그러면 숨결을 어떻게 고르게 하는가?

본래의 우주의 숨결로 가야 한다. 우주도 숨을 쉬는가? 쉰다. 천지도 숨결이 있다. 그것이 변화의 도수라는 것이다. 1년 돌아가는 것, 낮과 밤도 일음일양으로 천지가 숨을 쉬는 것이다.

그리고 봄여름가을겨울에서 봄여름에는 천지가 양도의 숨을 쉬고 가을겨울에는 음도의 숨을 쉰다. 봄여름과 가을겨울이 선천과 후천, 일음일양으로 숨 쉬고 천지가 1년 4계절로 큰 숨을 한 번 쉰다.

천지의 숨은 작은 숨과 큰 숨으로 나뉘어진다. 하루, 지구 일 년, 나아가 우주 일 년.

그리고 인간은 매순간마다 숨을 쉰다.

의식과 호흡은 음양적 관계

그러면 호흡작용이란 무엇인가?

지구촌의 각 영성문화, 힐링문화를 들어가 보면 반드시 호흡과학(science of breathing)이 있다. 수행문화의 뿌리를 공부해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호흡은 외부와 존재의 중심 생명을 연결시켜 준다. 호흡은 코로써 하는데 이 코의 기능을 보면 참 재미있다.

호흡작용의 수단인 코는 신경근육의 반응과 연결되고 자율신경계 교감 부교감 신경계와 연결되는데 신경근육의 반응이 뇌반구에 영향을 주어서 화학반응을 일으킨다. 코가 뇌의 화학적 전달체다. 그것이 모든 신체 기능에 영향을 주어서 체온, 혈압, 호르몬 상태 규치적인 생물학 주기를 포함하는 변화를 준다. 코가 호흡의 대문이다. 호흡을 하는 출입구다.

그래서 코는 인간과 환경을 연결시키는 고리라고 한다.

코로 호흡할 때 왼쪽 콧구멍과 오른쪽 콧구멍의 호흡이 다르다. 일음일양으로. 왼쪽 콧구멍은 감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래서 우반구하고 연결된다. 오른쪽 콧구멍은 이성적인 작용을 하는 좌반구와 연결된다.

인도의 수행전문가 하리쉬 조하리(Harish Johari)의 [호흡, 마음과 의식(Breath, Mind, and Consciousness)]이란 책을 보면 아주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

남녀가 관계를 할 때 남자가 왼쪽 콧구멍으로 숨을 쉬고 여자가 오른쪽 콧구멍으로 숨을 쉬면 아들을 낳는다고 한다. 참 우스운 이야기다.

이 호흡문제에서 결론적인 것만 간단히 정리한다.

왜 호흡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숨 쉰다는 현상에 대해 깊이있게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 그것은 인간 생명에서 가장 신비롭고 경이로운 현상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인간은 엄마 뱃속에서 나와서부터 숨을 고르게 쉬지 못하고 있다. 욕망이 차면 숨결이 가빠진다. 여기서 모든 병이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가 무한의 생명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다시 말해 거듭나지 못하는 것은 숨결이 고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본래 생명의 숨결의 리듬을 잃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호흡을 잘 조절해서 호흡의 길이가 길어지고 고르게 되면 즉각 마음에 영향을 준다. 마음이 평안해지고 자신감이 생기고 사물을 바르게 보고 주변에 있는 환경과 쉽게 하나가 된다.

반대로 호흡이 짧아지면 의식이 어지러워지고 자신감이 결여되고 환경에 기운을 빼앗겨 버린다. 주인 노릇을 못 하고 노예신세로 전락한다.

이렇듯 마음 현상이 현실적으로 내 몸에서 숨쉬는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내 생명의 변화현상에서 의식과 호흡은 음양적 관계에 있다. 숨을 쉰다는 것은 끊임없이 일음일양 운동을 한다. 겉으로 드러난다. 반면에 의식은 이면에 있는 것이다. 음적인 것이다. 내 마음은 소리가 없다.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수도를 할 때 잘 안 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내 몸을 이루는 근본 구성요소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이 마음이 뭔지를 잘 모른다. 마음의 특성을 잘 모른다. 내가 내 마음의 작용을 잘 모르기 때문에 내 마음을 어떻게 통제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현실적으로 내 마음은 호흡작용에서 즉각 영향을 받는다. 마음이 산란하고 생각이 번잡스러울 때, 하단전으로 고르게 호흡해 보라. 원래 내 생명의 근원인 하단전, 내 생명의 진액인 정(精)의 뿌리인 양쪽 신장-여기서 기가 발동한다. 이를 신간동기(腎間動氣)라고 한다 - 내 생명의 근원이 발동되는 단전에다 대고 호흡을 하면 본래의 성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모든 만물과 여여(如如)하고, 밝고, 하나가 되고, 일심(one mind)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마음을 통제하는 것이다.

호흡과 마음이 하나로 조화돼야

결혼 생활을 한 사람들 가운데 정을 사출 잘 하고 조루증 가진 사람들도 호흡 훈련을 깊이 하면 절대 정을 안 주게 된다. 그런 병이 해소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약을 먹는다거나 무슨 기구를 사서 붙잡아 매는 등 미친 짓하는 자들이 있다. 무지막지한 자들이다.

오만 년 사는 것이 호흡으로 성취된다. 호흡을 통해 생명의 시스템 자체가 완전히 뒤집어진다.

내 생명의 맑은 음적인 물기운은 아래에 있고 불기운은 떠있는 게 자연적 현상인데, 호흡을 통해 내 생명의 근원인 정을 기화(氣化)해서 위로 올린다. 정이 위로 못 올라가니까 기화해서 위로 올린다.

그리고 머리에 있는 탁하고 분열하는 불기운을 아래로 끄집어 내린다. 수승화강이 일어난다. 여기서 인간이 중생(重生)하는 계기가 비로소 열리는 것이다. 본래 생명의 근원인 성명으로 돌아간다. 성명이 하나가 된 그 자리로!

호흡을 잘 조절하면 의식이 금방 평안해진다.

그런데 호흡만 갖고 되는가? 아니다. 호흡작용만 조절해서는 안 된다. 호흡과 내 마음이 하나로 조화되어야 한다. 중도(中道)가 돼야 한다.

주문 읽으며 수도할 때는 의식을 머리에 두지 말고 하단전에 두고 호흡하라. 내 생명의 근원처인 하단전의 호흡과 의식이 하나로 어우러져야 한다. 배가 오르고 내리는 호흡의 리듬을 지속적으로 느껴라. 그러면 순간 저 파도치는 것 같은 생각의 일어남이 없어진다. 순간적으로 그 현상이 멎으면서 평안함이 오는 것이다. 가을하늘처럼 정신이 맑아진다. 그래서 자꾸 수도를 하고 싶어진다. 기분이 좋다.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걸 느끼게 된다.


참마음을 가지라

그러면 수행할 때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가?

상제님 말씀을 보라.

* 오욕(五慾)으로 뒤섞여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는 옥추문(玉樞門)을

열 때에 뼈마디가 뒤틀려 살아 남기 어려우리라. (道典 7:21:2)

오장(五臟)이 바르지 못한 자는 수숫대 꼬이듯 하여 죽고, 거짓말하는 자는

쓸개가 터져서 죽으리라. (道典 7:19:5)

개벽천지의 기가 정기(正氣)로 바뀐다. 선천 억음존양에서 정음정양 도수로 바뀐다. 그래서 바르지 못한 사람, 거짓된 자는 우주 가을의 정법 기운을 못 받는다. 거짓이 모두 드러난다.

인간의 마음을 여러 가지로 표현하지만, 불가에서는 청정심을 얘기한다. 상제님도 일심이니 성심이니 마음앞에 형용사를 붙여서 말씀하셨다. 하지만 상제님은 천지 일심을 가장 중요시하셨다. 천지 일심을 두 글자로 말하면 진심(眞心)이다.

진심, 참마음이 중요하다.

앞으로 상제님이 여시는 새 우주는 참이다. 참은 일체의 거짓이 없는 것이다. 거짓된 자는 죽는다. 하루하루 생활하면서 항상 참회하라. 그리고 한평생 누구에게 거짓말한 것, 누구 속인 것, 사기친 것을 완전히 멸해야 한다. 그것을 목적으로 항상 청수 떠 놓고 사배심고하라.

상제님이 그러시잖는가. “평생에 지은 허물을 낱낱이 생각하여 마음으로 사하여 주기를 빌라. (道典 3:167:14~15)”고.

상제님은 우리에게 평생 살아오면서 잘못한 것을 낱낱이 고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만일 잊어 버린 게 있으면 상제님이 혜두를 열어 주셨다. ‘아, 내가 무슨 죄를 졌구나 무슨 잘 못을 저질렀구나!’ 하고 고하게 해서 없애 주셨다.

* 나는 ‘참마음을 굳게 지키면 복이 먼저 이른다(眞心堅守福先來).’ 하노라.

(道典 9:13:2)

상제님 말씀이다. 모든 게 참(眞)으로 간다. 모든 생명의 참이 드러난다.

음란한 생각을 갖지 말고 호흡을 조절하자

공부가 안 되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처음 공부를 시작할 때 딴 생각을 하다가 주문을 읽으면 안 된다. 더욱이 일상적인 것이 아니고 음란한 생각을 했다? <거짓말> 영화를 보았는데 그 장면이 생각나서 음란한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순간 자기 몸에 있는 정이 오염되는 것이다. 그래서 몸이 근질근질하다든가 발정이 돼 버린다. 한 생각에 의해 그렇게 된다. 그 상태로 수도를 하면 정화가 안된다. 그것이 깊어지면 남자는 몽정을 하고 여자도 몸의 정기가 파괴된다.

초발심이라는 게 중요하다. 초기에 잘못하면 공부가 끝난다. 지금 문화라는 게 다 그렇다. 천지가 그런 문화에 절어 있다. 음란비디오물, 내가 보기엔 전부 포르노물이다. <거짓말>보다 몇 배 더한 만화영화도 나왔다. 그것 만든 자들 이번에 뻐도 못 추리고 다 죽는다.

지금 우주의 변혁 정신을 모르니까 다 그런 데에 빠져 있다.

처음부터 발심을 하고 수도를 해야 시간이 길지 않아도 공부 효과가 있다. 천지 기운을 그대로 받아먹는다. 정이 맑아진다.

처음부터 음심 품고 의식이 분열되면 정이 오염된다. 그래서 정⋅기⋅신(精氣神)으로, 정이 기화되고 기가 신화(神化)되는 것인데 정이 오염되면 기가 탁해지고, 신이 흐려진다. 백회가 열리지 않는다. 백회가 열리면 서기가 뻗친다.

김형렬 성도가 상제님이 앉아 계신 곳은 항상 겨울에도 눈이 내리지 않고 퍼런 서리가 천지를 뚫고 있다고 했다.

* 형렬이 아뢰기를 “전설에 ‘송우암(宋尤庵)이 거처하는 지붕에는 눈이

쌓이지 않고 녹았다‘ 하니 진실로 천지의 지령지기(至靈之氣)를 타고난

사람 인가 합니다.“ 하니

상제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그러하니 이제 나 있는 곳을

살펴보라.” 하시므로

형렬이 밖에 나가 보니 날이 차고 눈이 많이 내려 쌓였으되 오직 그

지붕에는 눈 한 점 없고 맑은 기운이 구름을 뚫고 하늘에 뻗쳐 푸른

상공이 보이더라. (道典 9:5:2~4)

이 상제님의 경계를 보라.

지금 그대들의 정이 오염되어 기가 탁해져서 신이 안 열리니까 수도를 해도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이다.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우리가 어떻게 수도를 해야하는지, 수도의 올바른 방법이 무엇인지, 기본적인 것을 알고 난 뒤에 수도를 하라.

수도할 때 마음을 바르게 닦는다는 것은 내 호흡을 잘 조절하는 것이다.

하지만 항상 고른 호흡을 할 수가 없다. 밥도 먹어야 하고 급할 때는 뛰어다니기도 해야 하고, 누구하고 싸우기도 해야 하고, 장사하려면 핏대도 올려야 한다.

그렇다. 그것이 중생의 삶이다.

상제님이 어천하실 때 석가에게 뭐라고 하셨는가?

“네가 중생을 아느냐?”

여기서 천지간의 모든 부처의 두 눈이 빠진다. 선천 불교의 기운이 끝난 것이다. 이 말씀에는 사실 여기서 말할 수 없는 너무도 깊은 의미가 깃들어 있다.

석가가 중생(衆生)의 벽을 허물고 부처가 되었다고 하는데 상제님이 호통을 치신다. 중생을 아느냐고.

사실 역사라는 것은 중생, 보통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다. 석가의 극락도, 예수의 천국도, 상제님의 후천선경세계도 다 중생들이 만드는 것이다. 자기 생명의 무덤을 파면서, 죽어가면서 말이다. 헤아릴 수 없는 숱한번뇌망상을 일으켜서 창조적인 사고를 통해 우주 문명을 일구어 간다.

그러나 우리는 가급적이면 호흡을 조절하자.


수행 자세, 반드시 허리를 펴라

그러면 수행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자세다. 올바른 자세! 항상 허리를 반듯하게 펴고 앉으라. 무릎을 꿇더라도 허리를 반듯하게 하라. 김형렬 성도 가족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상제님이 앉아 계신 모습은 마치 등에 널빤지를 댄 것처럼 아주 반듯했다고 한다.

상제님이 그러셨잖은가.

* 선천은 남에게 의지하는 바람에 기대고 망하나니 너희들은 하다못해

방벽에도 기대지 말라.

남의 덕 보기를 바라지 말라. 남의 은혜를 많이 입으면 보은줄에 걸려

행동하기가 어려우니라.

낭패(狼狽)란 짐승이 외발이기 때문에 두 마리가 서로 의지하여야

행보(行步)하게 되나니 남에게 의지하면 낭패를 당하리라. (道典 8:16:5~7)

반드시 모든 일을 내 힘으로 한다는 정신을 가져야 한다. 수도할 때도 마찬가지다. 은연중에 보이기를 기대한다? 그것 다 죽는 것이다.

반드시 허리를 똑바로 펴라. 허리를 펴면 잡념이 안 생긴다. 정신이 맑아지고 자신감이 든다.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도장에서나 가정에서 홀로 방석에 앉아 허리 펴고 수도하는 상제님 일꾼이나 구도자의 모습을 보라. 그 순간 가장 경건하고 존엄한 인간의 자태를 보는 것이다.

감히 발자국 소리조차 낼 수가 없다. 조심스러워진다.

자세가 흐트러지거나 허리가 굽어지면 잡념의 노예가 된다. 온갖 번뇌망상이 일어나 어둠의 소굴에 빠진다. 수도하거나 허리가 구부러지면 의도적으로 탁 펴라. 배만 나오면 사장이냐 하는 식으로 하단전, 아랫배를 내밀라.

그렇게 의도적으로 배를 약간 내밀면서 어깨를 뒤로 펴고 팔과 어깨의 힘을 자연스럽게 뺀다. 다리는 평좌로 한다. 결과부좌를 안 해도 좋다. 반가부좌식으로 해서 처음에는 평좌로 양 쪽을 수평으로 놓다가 팔이 좀 긴 사람은 손을 무릎 위에다 놓는다. 보통은 주먹을 살포시 쥐고 무릎 중간이나 아랫배쪽으로 대면 허리가 펴진다.

그리고 두 손은 불가식으로 결인을 해도 좋고 안 해도 좋다. 그저 편안하게 두어라. 왼손 바닥 위에 오른손등을 올려 놓아도 좋고 반대로 해도 좋다. 보통 때 호흡하는 리듬을 잘 지키고 싶으면 두 손을 배꼽 아래에도 놓으라. 그러면 단전을 통해 호흡을 느끼면서 정신이 호흡과 조화가 된다. 잡념이 훨씬 덜 생긴다. 정신 집중이 잘 된다. 공부가 빨리 된다. 아주 중요하다. 내 몸의 양기가 손끝을 통해 하단전으로 들어간다. 이거엔 원시반본의 의미도 있다.

다리가 아프면 다시 무릎을 꿇어보라. 무릎 꿇는 자세의 장점이 허리가 꼿꼿해진다는 것이다. 서양인들에게는 그게 굉장히 힘이 든다. 그들은 다리 저린 것을 핀으로 콕콕 찌르는 것 같다고 표현한다. 무릎을 꿇으면 허리가 더 잘 펴지고 공부가 더 잘 된다.

그러다가 또 다리가 저리면, 다시 평좌를 해서 왼쪽 다리를 오른쪽에다가 얹어놓고, 하다가 또 자세를 바꾸어 오른쪽 다리를 왼쪽에 얹어 놓고 하라. 그러다 보면 한 시간 반 두 시간이 그냥 간다.

참마음으로 주문을 읽으라

상제님이 참마음을 가지라고 하셨다.

참마음, 진심이란 무엇인가? 마음이 참되다는 게 무엇인가?

그건 일체의 거짓이 없다는 것이다. 욕망을 일으키거나 누구를 속이고, 뭘 행하기 위해 누구를 엎어뜨리거나 상처를 주는 것이 일체 없는 걸 말한다. 본래 내 생명의 순수한 근원이 진심이다.

그런데 진심은 마음의 본성을 뜻하기도 하지만, 극히 도덕적인 참된 마음을 말하기도 한다. 이번에 이 진심에 걸려 다 죽는다. 진법문화의 근본이 진심이다.

증산도 수행은 우주적인 대변혁으로 들어가는 수행이다. 그것은 단순히 선천의 원론적인 수행원리와 방법을 가지고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상제님이 태초 이래 처음으로 내려주신 주문이 있다. 그 가운데 첫 번째 주문이 태을주(太乙呪)다. 그리고 선천 상극 속에 날뛰고 있는 무수한 복마(伏魔) 마귀(魔鬼) 척신(戚神) 등 그야말로 영적 전쟁에서 가장 무서운 저항요인을 물리치는 운장주(雲長呪)를 주셨다.

또, 천지와 그 속에 살고 있는 인간 삶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이치를 깨치게 해 주는 천지의 진액주인 오주(五呪)를 주셨다.

新天地家家長世 日月日月 萬事知

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

福祿誠敬信 壽命誠敬信 至氣今至願爲大降

明德 觀音 八陰八陽 至氣今至願爲大降

三界解魔大帝神位 願?天尊關 聖帝君

그 밖에도 칠성경(七星經)이 있다. 북두칠성에서 장수하고 건강하게 해 주는 기운이 나온다. 나이 든 사람들은 시간 내서 칠성경을 많이 읽어 주면 무병장수(無病長壽)를 한다.

“칠성여래 대제군 북두구진 중천대신~_

주문도 참 좋다. 엄청난 기운이 온다.

그러면 태을주를 예로 들어보자.

태을주는 크게 보면 ‘훔치 훔치’ ‘태을천 상원군’ ‘훔리치야도래 훔리함리사파하’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태을주에는 유교, 불교, 도교, 기독교의 모든 깨달음의 열매가 들어 있다. 천상 신도세계의 궁극의 중심자리가 있다. 도통한 인간의 일심세계의 핵이 다 여기에 있다.

불교의 깨달음이 태을주에 있고, 도교의 깨달음의 뿌리인 태을신(太乙神),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하늘의 도통사(道通史)의 근원적 뿌리이자 주신인 상원군(上元君)님이 여기에 들어있다. 유가에서 말하는 천인사상(天人思想)의 보다 구체적인 핵심 내용이 태을주, 태을천(太乙天)에 다 들어 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세계의 음양적인 원리가 태을천에 다 들어 있는 것이다. 또 그들이 말하는 할렐루야, 아멘이 태을주의 결론 “사파하”로 맺어진다.

태을주 읽고 영원한 가을 생명이 되라

인간은 우주의 봄개벽 때 태어나 여름철까지 살아왔다. 세 번째 시간변화인 가을개벽 때, 하늘과 땅에서 모든 인간 생명을 거둔다. 그 거두는 우주의 주재신(Rulling God), 통치하는 분, 삼계대권을 주재하시는 분이 증산 상제님이다.

상제님이 공자, 석가, 예수를 내려보내셨다. 그리고 그들 신성과 보살들이 ‘상제님이 아니면 이 천지를 바로잡을 수 없다’고 해서 이 땅에 내려오셨다.

* 하루는 성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공사를 맡고자 함이 아닐되

천지신명(天地神明)이 모여들어 ‘상제님이 아니면 천지를 바로잡을 수

없다.’ 하므로 괴롭기는 한량없으나 어찌할 수 없이 맡게 되었노라.“

하시니라. (道典 4:100:12)

증산도 교리는 팔관법의 제 1법 상제관으로부터 우주관 인간론으로 해서 신관 수행관 천지공사가 쭉 있는데, 그 결론을 가르쳐 주고 개벽소식을 전해 주고 나면 최종적으로 태을주를 읽게 하는 것이다.

상제님 문화는 태을주 전수다. 태을주로 시작해서 태을주로 끝난다. 이 태을주를 인식하지 못하면 인간 값을 못 하는 것이다. 그냥 다 죽는다. 생명의 열매 맺는 가을의 창조법칙인 원시반본으로 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태을주를 안 읽으면 그 생명은 변화될 수 없다. 여름철이 끝나면서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태을주 읽는 것은 내가 가을 생명으로 화해 가는 방편이다. 많이 읽는 만큼, 참되게 읽는 만큼 크게 열매 맺는다. 성령을 받아 영이 열리고 생명이 밝아진다. 태을주는 성령을 받는 주문이다.

이 우주가 신천지로 태어나면서 내 생명도 새 천지로 들어간다. 태을주는 우리 몸이 새 천지 기운과 하나가 되어 개벽상황을 극복하게 한다.

천지 시간대가 가을로 전환할 때 지축이 선다. 그 때 대변혁적 충격이 온다. 태을주를 읽으면 거기서 오는 일체의 재앙, 사고, 자연 재난, 지진, 홍수, 질병 등으로부터 피해를 적게 받는 구원의 큰 은혜를 입는 것이다.


주문 읽는 법

우리가 수행한다는 것은 주문 읽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주문을 읽어야 하는가.

먼저 소리를 내서 읽는 방법과 귀에 들릴 정도로 작은 소리로 읽는 방법, 세 번째는 마음으로 읽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24시간 소리 내서만 읽을 수 없고, 마음으로만 읽을 수도 없다. 왜인가?

소리를 내서 읽는 것과 마음으로 읽는 공부법이 음양적으로 양면이다.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아닌가. 그러니까 소리 내서 읽는 것도 중요하고 마음으로 읽는 침묵의 방법도 중요하다. 이 독송(sounding meditation), 소리 내서 읽는 방법과 묵송(silent meditation), 소리 내지 않고 읽는 방법을 병행해야 한다. 두 가지를 같이 하라.

주문 소리는 호흡과 마음에 즉각 영향을 준다

그러면 소리 내서 주문 읽을 땐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일반적으로 수행한다고 하는 건 주문 읽는 것이다. 주문 읽는 것은 기본적인 두 요소, 유형적인 것 무형적인 것, 바로 호흡하는 것과 마음의 조절 문제에 커다란 영향을 준다. 왜 그런가?

마음은 세상에 대한 생각에 끊임없이 끄달리고 집착한다. 생각이 생각을 낳고 생각이 생각을 끌어오고 갖다 버린다. 또 누구를 미워하고 저주도 하고 좋아도 하고 히히덕거리기도 한다. 그러면서 호흡이 깨진다.

그런데 호흡을 의식적으로 잘 조절하면, 그런 생각과 번뇌가 많이 가라앉는다. 하지만 이것도 불완전하다. 지속적으로 안 된다.

이 끊임없이 번뇌 망상을 일으키는 의식 작용을 막아주고 호흡의 리듬을 끊이지 않고 지속되게 해 주는게 주문 읽는 과정이다.

주문을 계속 리듬있게 읽으면 호흡이 똑같이 자연스럽게 지속된다. 그러면서 어떻게 되는가? 주문 읽는 자체에 집중하기 때문에 일체의 생각이 멎는 것이다. 생각할 여지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주문 읽는 데에만 신경 쓰라.

주문 읽을 때는 어떤 원칙이 필요 없다. 경험도 필요없다. 그냥 주문 읽는 자체에 성실하라. 그러면 공부가 된다. 멋지게 읽지 않아도 된다. 처음 엄마를 따라 어린아이가 말 배울 때처럼 순수한 마음만 갖고 읽어 보라. 1, 20분만 읽어도 정신이 맑아져서 깜깜한 봄, 불을 다 껐는데도 밝고 환하다. 날이 샌 것도 같고 어떤 때는 하늘의 별이 다 보여서 우리집 천장이 뚫렸나 하고 눈을 뜨게 되는 경우도 있다. 초기에는 그렇다.

주문을 읽으면 두 가지 문제가 동시에 해결된다. 우리를 어둠으로 몰아가고 죽음으로 끌어들이는 분열의식이 없어지고, 호흡도 고르게 된다. 그러면서 주무 속에 깃들어 있는 무궁한 신성을 체험하고 새 우주를 여는 상제님의 기운을 따라간다. 주문 읽으면서, 원시반본의 도로 인도하여 가을 생명으로 태어나도록 하시는 상제님 기운을 마시고 토해내면서 따라가는 것이다.

주문은 반복해서 읽는다. 이것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내가 같은 주문을 백 번, 만 번, 천만 번 읽어도, 읽을 때마다 소리가 다르고 음질이 다르고 음폭이 다르다. 지속되는 것이다. 자전거 탈 때 패달을 자꾸 밟으면 어떻게 되는가? 그게 반복인가? 아니다. 그만큼 앞으로 가는 것이다. 일을 하는 것이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개벽 세계를 향해, 생명의 궁극의 근원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주문 읽을 땐 주문 읽는 것에만 신경을 쓰라. 주문을 소리 내서 읽을 때, 맑은 정신으로 내 마음이 그 소리와 하나가 돼야 한다. 인간의 호흡과 내 마음의 상태에 가장 즉각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이 소리다.

여기서 우리는 생명의 벽을 무너뜨리면서 우주 생명의 궁극의 근원, 대광명으로 가는 데 있어 가장 현실적이고 적극적이고 자극적인 세계를 발견한다. 우리를 도의 세계로 인도해 주는 또 하나의 세계, 그것이 소리(sound)의 세계다.

인도의 한 스승이 이렇게 말했다.

“소리야말로 인류 미래의 궁극의 음악이며 종교다.” 라고.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면 금방 감동을 받는다. 피로함도 싹 씻혀진다.

태을주 음악, 태을노래, 태을가가 이 우주 생명을 하나되게 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태어나게 한다. 이 태을세계 태을신 태을천에 들어가 보면 그 조화가 끝이 없다. 무궁한 조화세계다. 태을이란 우주만유 생명이 태어난 근원이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우주만유 생명의 고향이다. 우주의 자궁이다. 생명의 천지부모 자리다.

주문 읽을 때는 각 주문을 골고루 읽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가을 개벽 때에는 태을주를 바탕으로 읽어야 한다.

왜인가?

그래서 태을주는 모든 일을 뜻대로 할 수 있는 여의주(如意珠)와 같다고 했다. 태을주는 여의주다. 그 말씀을 깊이 느끼고 크게 깨달으려면 지금까지 얘기한 우주 법도, 가을로 돌아간다는 게 무엇인지를 크게 깨야 한다.

태을주를 모르면 기본적인 수행법 밖에는 모르게 된다. 기존의 유⋅불⋅선⋅도교 수행법 또는 힌두교의 수행법, 수피즘이라든지 유대교의 하시디즘이라든지, 이런 신비주의 수행법에는 대우주의 개벽, 생명의 틀이 바뀌는 가을개벽에 대한 소식이 없다. 그것을 새롭게 인식하라.

가을문화를 여는 상제님 도법

인간은 왜 사는가?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

아까 내가 성과 명을 말했다.

인간은 본래 내 생명의 밝은 모습,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한 생명력 자체를 회복하기 위해서 산다. 바로 그것을 회복하는 과정이 우리들의 삶인 것이다.

그런데 90% 이상이 그것을 파괴하고 분열하고 고갈시키는 삶을 살고 있다. 오욕에 파묻혀서 빠져나오질 못하고 있다. 퇴폐문화, 쾌락문화에 더럽혀져서 그렇다. 또 그런 교육을 못 받았다.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가르쳐 주는 곳이 없다. 종교판에서도 이것을 총제적으로 가르쳐 주는 곳이 없다.

상제님의 도는 가을문화다. 그 때문에 모든 것을 합해야 한다. 상제님 도법에서 선천문화의 핵심 진액을 다 엿볼 수 있다. 그것을 종합할 수 있게 해 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있다. 새 소식이 있다. 원시반본이라든지 태을주 세계라든지 태을천 태을신의 세계라든지 태을천 주신인 상원군님에 대한 소식이!

그러면 상제님은 누구신가?

우리가 명을 무한의 생명력이라고 추상적으로 말하지만, 이 우주에는 명의 주재자가 있다. 인간의 명을 이어 주기도 하고 끊기도 하는 주재자! 장수도 시키고 인간의 명을 짧게도 만드는 주재자!

[도전]에 보면 그 예가 많다.

김보경 성도가 아파서 살려 달라고 하니까 그 병을 개에게 옮겨서 살려 주신다. 또 환자의 병을 함열 숭림사 노승에게 옮기어 노승이 대신 죽게 하신다. 옛날 성자들은 생명의 명을 자유자재로 끊기도 잇기도 하는 권능이 없다. 상제님은 성과 명. 도통 세계의 주재자이시다.

나의 상제님! 우리들의 상제님! 이 우주의 상제님!

상제님과 상제님이 도통을 전수한 태모님은 천지의 부모님이다.

생명(生命)의 원래 말은 성(性)과 명(命)이다.

상제님은 명의 주재자다.

그러니 우리가 올바르게 기도하는 것, 상제님 태모님과 한마음이 된다는 것, 진실로 마음을 가지고 신앙하고 참 일꾼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이것은 우리들이 죽고 사는 문제다. 그냥 적당히 하는 사람은 이번에 다 절단난다. 핵랑군 조직에서 단계적으로 다 긁어내 버린다. 핵랑군으로서 명단만 올리는 것은 하늘 땅을 속이는 것이다. 최선을 다해 뛰어라.

올해 일을 안 하면 우주역사에 오욕을 남기는 것이다. 올내년은 가장 중요한 해다. 백 년을 총 결산하는 해다. 먹고살고 학교 공부하면서, 부지런히 모든 것을 다 바쳐 상제님 일에 헌신하라. 그렇다고 언제 개벽하는지, 내가 그 얘기는 안 한다. 지극한 마음으로 [도전]을 보면 다 씌어있다.

일심으로 일하라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핵랑군에 몸 담고 있는 일꾼들은 일심으로 일하라. 적당히 하지 말라. 가정에서도 마음을 널찍하게 잘 쓰면서 손정의처럼 일하라. 그 사람은 생각이 떠오르면 전광석화처럼 일한다. 그는 이 지구촌의 특전부대 류가 아니다. 전 세계 사람들이 놀란다. 그런 인간이 없다. 희귀종이다.

그는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입학한 지 15일 만에 졸업한다. 그것을 손정의에 대한 책 [21세기 경영전략]을 쓴 일본인 저자가 확인한 사실이다.

그가 고등학교에 편입했는데, 가 보니까 다 아는 것이더란다. 영어 실력만 딸리고. 선생님한테 가서 이건 다 이해할 수 있는 거니까 2학년으로 월반 시켜 달라고 해서, 2학년으로 간다. 2학년에 가서도 보니까 영어만 딸리고 나머지는 다 아는 것이다. 그래 3학년에 가야겠다고 3학년으로 갔다. 3학년 것도 조금 공부해 보니까 다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검정고시를 치게 해 달라고 한다. 교장이 안 된다고 하자 교장에게 따진다. 당신이 그런 얘기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느냐고. 그 자리에서 담당 관청, 우리로 말하면 교육청에 전화를 걸게 한다. 그리고 또 영어 실력이 딸리니까 영어 사전을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한다. 미국은 다인종국가이므로 그것을 인정해 준다. 사전을 놓고, 한 시간 걸릴 것을 두 시간씩, 이틀 동안 시험을 본다. 결국 시험에 합격해서 고등학교를 그만 둔 것이다.

그런데 그 어린나이에 따지고 덤벼드는 것을 보라. 내성적이고 소심한 사람은 못 한다. 그 사람은 무슨 일 있으면 직접 가서 결판을 낸다.

미국인들이 우리를 황인종이라고 얼마나 우습게 아는가. 그런데도 굴하지 않는다.

상제님 일은 그보다 한 수 더 높아야 한다. 천지가 뒤집어지는 일 아닌가. 이 세상 일거리 만나 밥 먹고 살고 하는 것은 다 두 번째다. 우주 대업으 위해 내 한 생명을 바쳐야 한다. 개벽이 몇 달, 몇 년 남았는지,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게 오히려 한스럽지 않은가.

그런 큰 마음을 갖고 서산의 일꾼들이 충청도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그런 줄 알라.

상제님 일은 핵랑군 육임군 나가는 과정이니까, 거기에 안들고 육임군 노릇 못 하면 명을 못 받드는 것이다.

천명을 완수하라

아까 여기 들어오다가 보니, ‘봉명(奉命)! 너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천하사에 종군하라’고 돼 있다.

저 명이 무엇인가. 그것은 성과 명 할 때의 명이 아니다. 명의 의미가 다르다. 그것은 우리 생명의 주재자의 명을 말한다. 내가 한 인간 생명으로 태어나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역사의 과업을 말하는 것이다. 개벽 천지의 일거리 명 자다. 일거리를 주시는 것이다.

개벽기에 그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생명을 건지는 일을 해야 한다.

이것이 천지의 명이다. 이것이 우주 주재자의 명이다. 봉명! 명을 받들라! 그 일을 완수함으로써 우리 생명이 천지와 더불어 영원한 것이다. 또 그 보은으로 도통도 받는다. 궁극적으로 상제님의 도통을.

그러니까 명은 천명(天命)이다. 우주의 절대자이신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너는 세상에 나가 무엇을 하라’고, 생명의 명 속에, 천지의 지고한 이법을 다스리는 절대자로부터 지고한 대명을 받아 나온 것이다.

천명을 완수 못 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을 하겠다고 입도식을 하고 천제를 지냈는데 말이다.

그건 헤아릴 수 없는 큰 죄다. 하지만 열심히만 하면 천지에 영광스런 존재가 되는 것이다. 다 함께 한마음이 되어 열심히 일해 줄 것을 기대하면서 말씀을 끝맺는다. 그만! ?